설교학의 대가 토마스 롱(THOMAS G. LONG)의 사복음서 설교 특별 강연에 다녀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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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하는 설교’, ‘고통과 씨름하다’의 저자 토마스 롱의 세미나가 “마가, 마태, 누가 그리고 요한의 교회에서 설교하기”라는 주제로 2019년 5월 22일 횃불트리니티대학원대학교에서 진행되었습니다. 한국에 방문하는 동안 다양한 방식으로 목회자들과 소통하고 있는 그의 이번 세미나는 특별히 목회 현장을 가진 설교자들을 위해 준비되었습니다. 그는 네 복음서가 가지고 있는 특징을 각각의 다른 교회에 비유해서 설명했습니다. 그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을 설교할 때, 각각의 교회 공동체가 모여있는 처치 스트릿을 떠올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실존했던 교회 공동체들이 어떤 곳이었는지를 살펴봄으로써 우리는 복음의 정수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다고 말입니다. 아래의 내용은 그의 강의를 함께 들은 후 필자가 그의 강의에 대한 안덕원(횃불트리니티대학원대학교 실천신학) 교수의 설명을 정리 및 재구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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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의 교회는 넷 중 가장 가난한 공동체였습니다. “가장 위대하고자 하면 섬겨야 한다.”라는 메시지를 주목해보기 바랍니다. 이것은 실은 그들이 위대하지 않았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제자들을 파송하는 장면을 보면 가장 오래된 교회인 그들이 가장 가난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제자들을 둘 씩 엮어 보낼 때, 마가복음은 페니를, 누가복음은 은화를, 그리고 마태복음은 금이나 은, 동을 지니지 말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또 마가의 제자들은 어땠습니까? 그들은 무지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온전히 알이듣지 못했습니다. 때로는 우리도 강단에서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원하는 만큼 설교가 충분히 전달되지 않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럼에도 공동체를 통해 하나님의 꿈과 이상은 실현되고야 맙니다. 우리는 할 수 없지만, 우리 주님이 하시는 공동체를 바탕으로 교회를 이루어야 하며, 그렇기에 우리의 설교는 계속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캘리포니아에 있던 어떤 교회의 이야기입니다. 그 교회는 철저히 소비자 중심적인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원하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 교회가 마가복음을 공부하면서 스스로 돌이켜 회개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부유한 우리들이 진정한 교회일 수 있는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하면서 진정으로 제자된 교회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바르트는 말했습니다. “혼란과 아픔, 당혹스러움 또한 믿음의 요소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하실 일이 있는 교회를 만들어 가야 하며, 마가의 교회가 바로 그런 곳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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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마태의 교회는 교육을 위한, 학교와 같은 교회였습니다. 어느 날 한 성도가 제게 당돌한 요구를 던졌습니다. “설교를 가르치세요? 부탁이 있습니다. 제발 학생들이 우리를 진지하게 다뤄줬으면 좋겠어요. 사탕발림 같은, 솜사탕 같은 설교 대신 내용이 있는 설교를 해줬으면 좋겠네요. 적어도 나는, 성숙하고 진지한 기독교인이 되고 싶기 때문이에요.” 마태복음에서 제자들은 배우고 또 성장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비유를 이해하고 있었으며,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의 좋은 선생님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교회 일치를 위한 어떤 종교간 대화 모임이 있었는데, 그 모임과 관계된 제 친구 랍비가 어느날 제게 말했습니다. “이 모임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네.” “왜? 무슨 일이 있나?” “이 모임에는 유대인인데 유대교를 모르는 이들과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기독교인들이 가득하다네.” 오늘날 이것은 큰 문제입니다. 기독교의 진수에 깊이 들어가지 못한 채 이것 저것 재단하고 판단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는 마태의 교회와 같은 교회가 필요합니다. 배움을 통해 성장하고 성숙하는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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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의 교회는 어떻습니까? 누가의 교회는 일종의 친교실입니다. 그곳은 먹고 마심을 통해 사람들의 사귐이 있는 곳이며, 이를 통해 게스트 리스트를 새로 만들어가는 교회입니다. 이전까지는 차별하고 배제하는 곳이었을지 모르지만, 이제는 모든 곳에서 온 사람들을 환대하는 곳이 바로 누가의 교회입니다. 성령 안에서 우리 모두는 다 초대받은 자들입니다. 사도행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계급을 초월하고 출신도 무의미한, 오직 성령 안에서 잔치와 같은 예배가 이루어지는 곳이 바로 누가의 교회입니다.

여기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잘 보여주는 예가 있습니다. 제가 다녔던 교회 중에 홈리스 사역을 하는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전통에 따라 재의 수요일마다 종려가지를 태운 재에 기름을 섞어 이마에 성호를 긋곤 했습니다. 어느 재의 수요일에 홈리스 60여명이 이 일을 위해 모였습니다. 한 편 그 교회 앞에는 주정부 소속 건물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도 참석을 권했더니 주정부 공무원 40여명이 함께 와서 홈리스들과 함께 하나된 예배를 드렸습니다. 서로 다른 신분과 상황에 놓여 있는 100여 명의 성도들이 서로의 이마에 십자가를 그어주며 예배드렸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날마다 이와 같은 잔치가 일어나는 곳이며, 누가의 교회가 바로 그런 곳이었습니다.

또 누가의 교회는 강청하는 과부 이야기처럼 기도하는 곳입니다. 과부가 가진 능력이라곤 재판관을 귀찮게 하는 것 뿐이었습니다. 이렇게까지 말도 안되는 억지를 부리는 과부에게도 갚아주는 곳이 하나님의 나라라면, 우리에게 또한 잔치에 대한 그런 기대가 있는 것이 마땅한 일 아닐까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이야기는 또 어떻습니까. 그 본문은 일상의 식사가 잔치가 되고 성찬이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바 성경의 이야기, 설교가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곳이 누가의 교회였으며, 이는 또한 우리의 주일 예배가 이루어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성찬의 역사가 경험되는 교회, 그것이 바로 누가의 교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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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반해 요한의 교회는 일종의 하우스처치였습니다. 그들은 이미 성령 안에서 하나였습니다. 요한의 교회에는 시계가 없습니다. 그곳은 과거와 현재가 함께 하는 곳이며. 노래하는 공동체였습니다. 그들에게 주님은 이미 여기 계신 분이며 또 장차 오실 분이었습니다. 누가복음은 일상적인 시간과 영원의 시간이 만나는 곳이었습니다.

나사로의 이야기를 기억하십니까?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마르다는 “마지막 날 부활의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압니다”라고 답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로 자신의 부활임을 말씀하십니다. 부활은 마르다에게 미래의 일이었지만, 예수님에게는 바로 오늘의 일이었습니다. 시와 노래로 시작하는 요한복음의 첫 부분을 기억해 보십시오. 과거와 미래, 현재가 오늘에 만나 그리스도의 놀라운 현존을 경험하는 공동체가 바로 요한의 교회였습니다.

설교자들은 사실 어느 공동체에 가든지 복음서의 네 교회가 보여주는 그리스도에 대해 각기 다른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설교자로서 혹은 목회자로서 그것을 감안해야 합니다. 그것은 공동체들의 특성이기도 합니다. 당신은 그 공동체를 위해 부름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않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특징과 교회 공동체의 특징 모두를 사용하심을 기억하면서 내가 알고 있는 훌륭하고 멋진 어떤 다른 교회가 되려 하기 보다, 마태가 마태의 교회를 이룬 것처럼 각자의 모습에 충실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70분 남짓의 짧은 강의였지만, 참석한 모든 이들의 갈급함을 충분히 충족시키는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짧은 영어를 친절한 정리로 도와주신 안덕원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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