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애는 죄인가?’라는 질문을 씹고 뜯고 물고 핥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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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작하는 말

몸통을 드러냄 없이 그저 한 두 마디의 조소적 미메시스의 남발은 완고한 이데올로기를 해체시키기 보다는 오히려 양단간에 세워진 두터운 벽을 더욱 공고하게 하는 경우를 자주 목격해왔다. 따라서 동성애와 관련한 논쟁이 부각될 때 그저 한 단편만 이야기해버림으로써 서로간의 오해의 벽이 더 두터워지는 것을 막아보고자, 보다 일관된 방식으로 ‘동성애는 죄인가?’라는 물음에 따른 또 하나의 ‘가능한’ 기독교적 입장을 모색해보고자 한다.

‘동성애는 죄인가?’라는 물음에서 사용되는 ‘죄’라는 단어는 기독교적 개념 안에서 통용되는 개념이다. 곧,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는 것’ 정도로 보면 될 듯 하다. 물론 메타전제적 의미에서, 우리 인간은 모두 죄된 구조를 가지고 있기에 우리가 생산해내는 모든 유무형의 가치들은 ‘죄'(혹은 ‘불완전성’에 의해 야기되는, 그리하여 초월인 하나님을 유한한 범위 안에 제한시켜버리는)와 뗄레야 뗄 수 없음은 주지의 진리이다. 사실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그것을 ‘유/무죄 판정’의 시각으로 보는 것 자체가 염려스런 접근이긴 한데, 그 이유는 아무리 ‘무죄’라고 결론내리나 하더라도 그것이 법정용어인 이상 ‘유/무죄 판정’ 이전에 ‘뭔가 문제가 존재한다’라는 가치판단을 이미 깔아놓은 상태에서 내려진 재판부의 결론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염려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우리 스스로가 더 큰 죄를 범하지 않게 하기 위해 겁대가리 없이 이 글을 쓴다.

이 글이 갖는 한계는 아마도 전체 ‘퀴어(queer – 성소수자)’의 범주 안에 존재하는 다양성을 모두 다 커버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하겠다. 이 글에서는 동성애자, 즉 레즈비언과 게이의 경우에 국한하여 동성애 문제를 다뤄보겠다. 그러나 이 글의 요지가 제대로 전달된다면 모든 성소수자의 경우에까지 적용될 수 있는 그 무엇을 독자는 발견할 수 있을 거라 기대한다. 곧 열리게 될 제 16회 퀴어문화축제에 대해서도 조금 더 다른 시각으로 접근해볼 수 있기를 기대하며 글을 시작한다.

2. 동성애의 이해

1) 범주 구분

제목을 ‘동성애의 이해’라고 붙였다고 해서 겁먹지 마시길. ‘해봐야 안다’ 따위의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사실 우리는 동성애를 너무나도 성급하게 일반화시켜서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의 이러한 일반화 경향은 다음과 같은 질문 앞에서 대번에 드러난다: “이성애는 죄인가?”

만일 우리가 ‘이성애는 죄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이성애는 ‘죄’가 아니지 않나 싶으면서도 그렇다고 ‘죄’인 경우가 없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에 좀 헷갈려진다면, 그리하여, ‘에이, 케바케로 생각해야지’라고 말하고 싶다면, 적어도 동성애를 바라보는 전체주의적 시각에서 벗어날 준비가 된 것이다. 그렇다! 이성애 그 자체를 두고 죄다 아니다 논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인데, 그 이유는 그것이 죄인지 아닌지에 대해 판별할 ‘전제’가 드러나있지 않아서이다. 이렇게 물으면 좀 더 쉬운 대답이 가능해진다. 싱글인 남자와 싱글인 여자가 만나서 서로 사랑을 하고 서로에게 충실하게 사는 것은 죄인가? 그게 무슨 죄야. 차라리 하나님에 의해 보증되는 ‘권장사항’에 가깝겠지. 그런데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성폭행했다면 이 남자의 이성애 행위는 죄인가? 당연히 죄다.

‘이성애’라는 범주 안에는 수많은 카테고리가 존재한다. 즉 어떤 특정한 이성애 행위(그것이 꼭 섹스일 필요는 없다)는 그 정황이 그 행위에 대한 판단의 근거가 된다. 결혼한 남녀 사이의 서로 간의 따뜻한 사랑 고백은 무죄이다. 그러나 결혼한 사이라고 해서 남편이 아내의 거부의사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성적 욕구를 풀기 위한 도구로 아내를 이용한다면, 그것이 결혼이라는 공적 제도 하에 이루어진 것이라 하더라도 유죄다. 사회법적으로는 부부간 강간으로 처벌받기는 어려울 수 있어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까지 살리고자 하는 한 인격체를 ‘도구화’하는 것은 전혀 하나님적이지도 않을 뿐더러 ‘하나님과 멀어지는 것’이라는 점에서 ‘유죄’다. 여자를 보고 마음에 음욕을 품는 경우는 무죄인가 유죄인가? (이건 성경에 나와있으니 반칙인가..) 나이트에서 처음 본 이와의 사랑 없는 섹스는 무죄인가 유죄인가? 굳이 섹스의 문제를 차치하더라도, 여자가 싫다는데도 자신의 집착적 만족을 위해 그 여자를 집요하게 따라다니는 남성의 플라토닉한 이성애는 무죄인가 유죄인가? 한 달에 한 번식 애인을 바꾸는 남자 혹은 여자의 이성애는 정당한 것인가? 도저히 애인 없이 혼자 지낼 줄을 모르는 남자 혹은 여자의 경우는? 양다리의 경우는? 여러 판단의 근거가 있을 수 있겠으나, 어떠한 경우에라도 자신의 욕망을 위해 상대를 도구화하는 행위는 결코 십자가 신앙과 양립될 수 없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이러한 필자의 준거틀을 좀 더 거칠게 적용해본다면, ‘이성애’라는 범주에는 두 가지 종류가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당사자 간의 사랑에 의한 이성애와, 자신의 욕구 충족을 위해 상대방을 도구화하는 이성애가 그것이다. 이 적용이 ‘거칠다’고 표현한 이유는 ‘이성애’라는 범주가 또다른 준거들에 의해 더 많은 갈래로 나누어질 수 있으며, 또 그래야 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이성애를 ‘전체주의적인 시각’으로 보고 이성애 자체가 죄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한 규정이라는 것이다.

동일한 범주 구분은 동성애에 대하여도 이루어져야 한다. 적어도, 당사자간의 사랑에 의한 동성애와, 자신의 욕구 충족을 위해 상대방을 도구화하는 동성애로 구분되어 논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향후 논의의 편의성을 위해 다음과 같이 표식화한다.

  • [1-A] 당사자간의 사랑에 의한 이성애
  • [1-B] 자신의 욕구 충족을 위해 상대방을 도구화하는 이성애
  • [2-A] 당사자간의 사랑에 의한 동성애
  • [2-B] 자신의 욕구 충족을 위해 상대방을 도구화하는 동성애

2) 범주 구분의 타당성 고찰

물론 이 범주 구분에 대한 논란이 있을 수 있겠다. 이 구분은 정당한 것인가? 보다 노골적으로, 동성애는 그 자체로 잘못된 것, 비정상적인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2-A], 즉 ‘당사자간의 사랑에 의한 동성애’라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 그냥 지들의 죄된 습성을 합리화하기 위해 내놓는 핑계 아니냐? 그리고 또 다른 측면에서, 이 구분은 과연 얼만큼 실효적인 것인가? 이게 과연 칼로 무 자르듯 뚝 나뉘어지는 문제냐? 등의 문제제기가 있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하면서, 이 범주 구분이 비록 완벽하지는 않겠으나, 나름의 정당성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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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성 지향의 선천성 문제

첫째, 동성애는 그 자체로 잘못된 것, 비정상적인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동성애가 하나님[의 창조]로부터 연유한 것인가 하는 질문으로 바꿔 물을 수 있다. 동성애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라면, 즉 동성 지향이 선천적인 것이라면, 동성애자로 창조되고 태어난 이들의 성적 지향은 ‘순리’적인 것이며, [2-A]가 가능하고, 따라서 동성애는 죄가 아니라고 유추할 수 있다. 그러나 동성애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면, 즉 동성 지향이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면, 동성애자들의 성적 지향은 본인의 후천적 선택일 뿐이며, 따라서 동성에 대한 이들의 성적 지향은 ‘역리’적인 것이 되고, 창조 질서에 반하는 ‘죄’가 되며, [2-A]는 불가능하다. 물론 이러한 단순화는 ‘퀴어’의 모든 다양성의 사례를 모두 포용하기엔 너무 딱딱하다. 그러나 앞서 밝혔듯 이 글은 게이와 레즈비언의 경우에 집중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중요해진 질문은 이것이다: 동성에 대한 성적 지향은 선천적인 것이냐? 동성애자로 창조되어 태어난 사람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동성애의 선천성을 부정하는 입장에서는 주로 성경의 기록을 근거로 하여 그 입장을 개진한다. 즉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남자와 여자로 지었다는 문자적 기록을 그 근거로 삼으려 한다. 그러나 이 근거에는 헛점이 있는데, 예를 들어, 성경에 ‘손톱은 매일 자라나도록 창조되었다’라는 문자적 언급이 없다고 해서 ‘손톱이 자라나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현상이 아니며, 고로 선천적인 것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없고, 이에 소급하여 ‘손톱이 자라나는 것은 죄다’라고도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성경은 모든 것의 열쇠라고 믿지만, 그렇다고 이 세상의 모든 열쇠구멍을 다 나열하고 있지는 않다. (성경의 영감에 대하여는 이후에 더욱 집중적으로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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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편람(DSM) V

현대 의학은 이에 대해 어떤 의견을 가지고 있는가? 미국 정신의학협회(APA)에서 발간하는 ‘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편람(DSM)’이라는 게 있는데, 어떤 증상에 대하여 그것이 정신질환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전세계적 교과서가 바로 DSM이다. 이 책이 처음 만들어질 당시(DSM-I, 1952)에는 동성애를 ‘정신질환’으로 보았다. 즉 이성애가 선천적이고 ‘정상’적인 상태인데, 뭔가 정신적 질병으로 인해 동성 지향성을 후천적으로 가지게 되었다고 본 것이다. 그런데 1994년에 출간된 DSM-IV부터는 동성애를 더이상 정신질환으로 보지 않게 되었다. 즉 동성애의 선천성이 상당 부분 인정된 것이다. 현재는 2012년에 나온 DSM-V가 최신 버전이다.

물론 여기에는 여러 가지 고려되어야 할 점이 있다. 모든 정신과 의사들이 이에 100% 다 동의하냐? 아니지. 현재 DSM과는 반대되는 의견을 가진 이들이 분명히 존재하며, 아주 미미한 숫자도 아니다. 그러나 다수의 정신과 의사들의 소견에 따르면, 동성애는 ‘정신질환’이 아니다. 그렇다면 동성에 호감을 느끼는 모든 사람들은 선천적으로 동성 지향을 가지고 태어난 거냐? 그런 것도 아니다. DSM-V에서는 이전까지 사용되어온 “성 정체성 장애”라는 용어를 “성 불쾌감”으로 대체하는데, 이 용어는 “자신이 다른 성으로 잘못 태어났다고 생각해 고통을 겪는” 증상을 지칭한다. 즉, ‘동성에 대한 지향성’이 무조건 ‘선천성’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 여러 다른 이유(예를 들어 ‘트라우마’)로 인해 생겨날 수도 있다는 것.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선천적 동성 지향’의 가능성을 약화시키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명시해야 하겠다.

토마스 새뮤얼 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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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학계’라는 것도, 토마스 쿤(Thomas S. Khun)의 <<과학 혁명의 구조>>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딱 하나의 불변하는 ‘절대이론’이 존재한다기 보다는 ‘패러다임들’ 사이의 끊임없는 헤게모니 싸움의 산물로 읽혀질 수 있다는 점에서, 현대 의학계에서 통용되는 바를 맹목적으로 ‘절대화’하는 우를 범해서도 안 된다. 물론 그렇다고 동성애를 정신질환으로 보았던 DSM의 입장이 바뀌게 된 주요한 이유가 ‘동성애자들의 엄청난 로비’ 때문이라는 확인 안 된 이야기에 혹하는 우를 범해서도 안되겠다. (가만 생각해봐도 동성애를 정신질환화하려는 쪽의 로비가 훨씬 더 강할 듯 한데…)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우리의 앎의 한계를 인정해야만 한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우리가 ‘불가지론‘이라는 다소 치사한 카드를 써야 할 지점이 아닌가 싶다. 물론 좀 치사하긴 하다. 현대 의학계가 동성애의 선천성에 보다 더 손을 들어주는데, 성경에 몇 줄 써졌다고 ‘불가지론’이라니! 하지만 이 스탠스는 단순한 ‘추궁 포기’의 문제가 아니라, 확정하기 어려운 선천성 문제를 자꾸 확실성의 영역으로 끌어내려와서 서로 자기네 말이 맞네, 하는 건 논의의 발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에 기인한다. 하여, 선천성을 빙자하여 나타나는 아전인수격 평행선 달리기를 방지하기 위한 ‘정직’의 문제로서, 우리는 불가지론을 외쳐야 한다. 동성 지향에 대한 선천성? 과학이 점점 더 발전하면서 우리가 어느 정도 범위 내에서 말할 수 있는 것들이 더 많아지긴 했지만, ‘확실성’의 차원에서 보자면, 아직까지는, ‘확실히 알 수는 없다’라고 하는 것이 현재로서는 가장 정직한 답변일 것이다. 진리의 차원에서 우리가 동성 지향이 선천적인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우리는 ‘알 수 없다’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세상의 지식(DSM)을 하나님의 지식(성경)과 동등하게 놓는 것이 옳으냐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성경에 대해서는 조금 있다가 본격적으로 다루기로 한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필자는 창조주가 아니기에, 창조주가 그렇게 했던 것이면 그런갑다 하는 것이고, 창조주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그렇지 않은갑다 해야 하는 존재일 뿐이다. 외계인에 대해서도 비슷하게 말할 수 있는데, 미래의 어느 순간에 외계인의 존재가 확인된다면, ‘성경에는 안 나와 있으니 거짓말이다!’라고 할 수 있는 게 아니고, ‘아, 하나님의 창조의 범위에 외계인도 포함되는 것이었구나’라고 해야 한다는 것. 요는,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확하게 어떻게 인간을 창조하셨는지 ‘알 수 없다’. 만일 동성 지향이 선천적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이 ‘실수’로 그렇게 창조하셨는지, 아니면 전혀 실수가 아닌 채로 그렇게 창조하셨는지에 대해서 역시, 우리는 ‘알 수 없다’.

결론적으로, [2-A]가 정말로 가능한 것인가? 알 수 없다!!! 이 ‘알 수 없다’는 선언은 ‘[2-A]는 불가능하다’는 말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이다. DSM의 판단을 존중하여 가능성을 따져본다면, 동성애는 선천적’일 수’ 있으며, 이것이 선천적이라 함은 곧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셨’을 수’ 있으니, 곧 동성애는 소위 ‘정상’ 내지는 ‘순리’인 것으로 ‘볼 수’ 있고, 그렇다면 [2-A]가 가능’할 수’ 있다. 그러한 가능성에서, 위의 범주 구분은 완벽한 것은 아니나 나름의 이해를 위한 효용성이 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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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동성 지향과 이성 지향 사이의 모호성 문제

둘째, 이 범주 구분의 최약점은 [1-A]와 [1-B] 사이, 혹은 [2-A]와 [2-B] 사이가 완벽하게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일 것이다. 아내를 사랑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아내와의 결혼 생활 내내 도구화가 전혀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또한, 위험한 이야기지만 도구화 과정에도 사랑이 아주 완전히 배제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도구화된 피착취자의 입장은 별개라는 점에서, 도구화를 정당화하려는 것은 아니다. 사랑과 ‘집착’이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다.

동성애적 성적 지향에 대한 내용을 담은 킨제이 보고서에 따르면, 사람은 ‘이성애자’와 ‘동성애자’로 딱 부러지게 이분법적으로 구분되지 않으며, 오히려 성적 지향의 문제는 ‘정도’의 문제로 해석된다. 킨제이는 그의 연구팀과 함께 많은 사람들을 심도 있게 인터뷰한 이후, “사람들은 완전한 이성애자나 완전한 동성애자로 태어나지 않는다”고 결론지으면서, 7가지 분류법을 개발했다. 분류들은 다음과 같다. (0) 동성애가 없는 완전한 이성애, (1) 주로 이성애, 부차적인 동성애, (2) 주로 이성애이지만 부차적이지 않은 동성애, (3) 이성애와 동성애가 동등, (4) 주로 동성애이지만 부차적이지 않은 이성애, (5) 주로 동성애, 부차적인 이성애, (6) 이성애가 없는 완전한 동성애, (x) 성적 접촉이나 반응이 없음(무성애). 이러한 킨제이의 연구결과는 성적지향에 대한 기존의 이분법적 시각을 폐기처분시켰다. 개인의 성적 지향은 두 개의 극 사이 어딘가에 위치하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이야기되는 성적 지향을 굳이 ‘섹스’로 환원할 수는 없다. 즉 대부분의 이성애자들 역시 아주 약간이라도 동성애적 성적 지향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 곧 ‘동성과 섹스하고 싶은 욕구’로서 읽어낼 수는 없다는 것. 이를 위해서는 다니엘 헬미니악(Daniel Helminiak)의 글을 인용하는 것이 좋겠다.

Daniel A. Helminiak

Daniel A. Helminiak

섹슈얼리티는 신체적 각성과 오르가즘 이상의 것이다. 사람의 섹슈얼리티에는 애정을 느끼는 능력, 다른 사람 때문에 기뻐하는 능력, 다른 사람과 정서적으로 친밀해지는 능력, 그리고 그 사람에게 열정적으로 헌신할 수 있는 능력 등이 결부되어 있다. 섹슈얼리티는 경이로운 이간의 경험인 사랑, 곧 다른 사람의 아름다움에 반해서 자신으로부터 벗어나는 행위, 다른 사람에게 매우 강하게 끌려서 자신은 물론이고 상대에게 이롭도록 순순히 자신의 삶을 맞춰 나가는 행위의 핵심이다. (헬미니악, 8)

Audre Lorde

Audre Lorde

흑인 여성철학자 오드리 로드(Audre Lorde)는 헬미니악이 ‘섹슈얼리티’라고 언급한 것을 “성애(eros)” 혹은 “성애력(erotic power)”라고 명명하였고(Lorde, 77), 신학자 카터 헤이워드(Carter Heyward)는 관계 안에서 진실된 연결과 상호성을 갈망하게 하는 이 ‘성애(eros)’는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연유하는 것이라고 보면서, 우리는 이러한 ‘진실한 상호 간의 깊은 연결’을 “우리는 섹스(sss), 일(work), 교회 생활(Church lives)을 포함한 우리 삶의 모든 양상에서 갈망한다”고 주장한다(Heyward, 115). 이러한 통찰들은 섹스하고 싶은 욕망이 진실한 상호 연결을 갈망하는 성애욕구(‘섹슈얼리티’, ‘성애’, ‘성애력’..)의 부분집합이며, 이러한 ‘성애’를 향한 갈망은 항상 섹스욕구보다 한참 넓다.

Carter Heyward

Carter Heyward

이와 같이 ‘성애’를 보다 넓은 의미로 ‘타자와의 상호 연결의 힘’으로 이해한다면, 성애의 대상은 단지 이성에만 국한될 필요는 없다. 하나님과 연합하려는 열망과 신앙은 물론이거니와, 훌륭한 선생님을 만나 그분을 동경하고 배우려는 열망이라든지 동성 친구들 간의 의리와 우정 역시 ‘성애’의 범주에 충분히 들어오고 남음직한 것이다. 단지 ‘섹스’적 관점에서 보지 않을 뿐이지, 이성애적 성향이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도 절친한 동성 친구들끼리 서로간의 매우 깊은 상호 연결의 힘을 경험한다. 그렇다면 동성지향 지수가 높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2-A]의 관계가 충분히 가능하리라 예상해볼 수 있다.

그러한 점에서, 이 범주 구분은 어디까지나 ‘무엇이 얼만큼 주도적인가?’라는 질문 이후에야 유효하다. 어떤 이성애자도 [1-A]나 [1-B] 한 곳에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동성애자라고 해서 꼭 [2-B]에만 고정되어 있는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물론 여기에 대해 ‘동성애가 얼마나 문란한데!’라는 생각으로 동성애자들 사이에서는 [2-A]의 관계가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하고 싶어하는 분들을 위해서는 뒤에서 좀 더 심도있게 논의할 것이다. 혹은 성경을 기준으로 [2-A]의 불가능성을 논하려는 이들에 대해서는 이제 곧 다루게 될 것이다.

아무튼 이 범주 구분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우리가 동성애에 대해서 논할 때, ‘동성애자는 다 똑같다’라는, 전체주의적인 시각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를 논의의 주된 전제로 삼고, 다음으로 넘어가 보자.

(2편에서 계속..)

 

*본 글의 이미지와 참고링크는 편집부에서 추가한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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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인 척 하고 싶지 않은 b급 날라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