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애는 죄인가?’라는 질문을 씹고 뜯고 물고 핥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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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성경과 동성애

기독교인으로서 모든 판단의 준거점은 ‘하나님’이며, 그러한 점에서 ‘하나님’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순수한 확실성을 존재론적으로 소유하고 있을 수 없다. 그리하여 우리가 동성애에 대해 논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하나님은 동성애를 어떻게 생각하시는가’를 따져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 기획은 ‘하나님은 초월이시다’라는 친근한 전제 안에서 항상 제한적이며 따라서 ‘답’을 얻을 수는 없다. 안타깝지만, 하나님은 ‘직접’ 답을 말씀하시지 않는다. 그렇다면 개신교인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답을 ‘성경’에 근거하여 유추해볼 수 있다. 하여, 우리는 동성애에 대한 하나님의 의향을 살펴보기 위해 동성애와 관련한 성경의 진술들을 확인해야 한다.

이를 확인하기 이전에 고려되어야 할 지점은, ‘과연 “동성애와 관련한” 성경의 범위가 어디까지인가?’이다. ‘동성애’ 관련 표현이 나오는 본문만을 ‘동성애와 관련한’ 성경의 태도로 확정할 수 있는가, 아니면 이 범위가 더욱 확장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두 부분을 모두 고려해보겠다.

1) ‘동성애’ 관련 표현이 등장하는 성경 본문의 경우.

먼저 문자적으로 ‘동성애’ 관련 표현이 등장하는 성경 본문의 경우는 (1)창19:1-29(소돔과 고모라 본문), (2)레18:22, (3)레20:13, (4)롬1:26-27, (5)고전6:9, (6)딤전1:10 이다. 물론 신명기와 열왕기상하에서 “남색하는 자” 혹은 “남창”을 언급하는 부분도 포함시키려는 이들도 있지만, 헬미니악에 의하면 이것은 킹제임스 성경의 오역이 다른 번역에 영향을 준 사례이며, 히브리어 /qadheshim/은 ‘헌신된 자들’, 그러니까 이방신에게 헌신된, 우상숭배를 하는 자들로 번역되어야 한다고 보았다.(헬미니악, 178) 아무튼, 문자적인 측면에서 성경은 구약과 신약을 통틀어 ‘동성애’ 지칭 표현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며 그것을 어렵잖게 ‘죄’의 목록에 올려놓는다. 그렇다면 성경은 동성애를 죄로 본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문자적 성서 해석을 일삼는 이들을 제외한) 많은 성서학자들은 성서에 기록된 특정 태도가 모든 다양한 상황에 다 적용시킬 수 있다고 보지는 않는다. 성서의 특정 기록은 – 최소한 1차적으로는 – 특정한 상황 안에서 특정한 대상을 향하여 발화된 내용이다. (물론 성서의 말씀을 오늘날의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데, 이것은 언제나 2차적인 작업이다.) 예를 들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그들에게는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고전14:34)라는 성서의 구절은 보편적 여성, 그러니까 AD 1세기의 모든 여성과 2015년의 모든 여성, 심지어 구약시대의 모든 여성을 대상으로 발화된 것이 아니라, AD 1세기의 여성 중에서도 특정한 일부(혹은 한) 여성, 고린도교회를 어지럽게 했던 특정인을 향해 발화된 것으로 받아들인다. 이 구절이 쓰여 있으니 당장 이번 주부터 교회에 가서 ‘자자, 교회에서 여자들은 입 다무시오’라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고린도전서의 기록은 결코 2015년의 모든 여성을 염두에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 [1-A] 당사자간의 사랑에 의한 이성애
  • [1-B] 자신의 욕구 충족을 위해 상대방을 도구화하는 이성애
  • [2-A] 당사자간의 사랑에 의한 동성애
  • [2-B] 자신의 욕구 충족을 위해 상대방을 도구화하는 동성애

그렇다면 우리는 ‘동성애’ 지칭 본문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생각해볼 수 있다. ‘동성애’ 지칭 본문들은 정확히 ‘동성애’ 자체를 타겟으로 삼아 정죄하는 것으로 보면 되는 것인가? ‘동성애’ 지칭 본문들은 무언가 특정한 배경에서 특정한 대상을 향해 발화된 본문이라고 볼 수 있는 가능성은 없는 것인가? 동성애와 관련된 것이면 모두 다 죄악시되어야 하는가? 앞서 필자가 제안한 범주 구분에서, [2-A]이든 [2-B]든 어쨌든 ‘2’가 들어가면 모두 다 ‘죄’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인가?

적지 않은 신학자와 성서학자들 – 굳이 이런 단서를 붙여야 하는게 유감스럽지만, 필자가 알기로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구원자’라는 사실에 동의하는 그리스도인.이다. 물론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도 있다 – 은 ‘동성애’를 지칭하는 성서 본문이 정확히 ‘동성애’ 자체를 타겟으로 삼아 정죄하는 것으로 보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에서 하나님이 분노했던 지점은 동네 불량배들이 손님들에게 “우리가 ‘상관’해야 하겠다”는 대목이 아니라, ‘손님에 대한 소돔성의 냉대'(대표적으로 Sherwin Baily, Victor Furnish) 혹은 그날 밤 롯의 죄 없는 두 딸에게 행해진 가혹한 ‘성폭행’, ‘살인’, 또는 ‘자신의 쾌락을 위해 인간을 도구화함’, 그리고 그에 대한 ‘무관심'(대표적으로 James Nelson)에 근거한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는 논증이 이미 ‘퀴어비평(queer criticism)‘이라는 제하에 소개되어 왔다.

또한 레위기와 로마서 등지에서 언급되는 동성애는 사실상 이방 종교의 ‘우상 숭배 행위’를 지칭하는 ‘대명사’로서 사용되었다는 논증이 이미 많이 소개되어 있다. (대표적으로 John Boswell) 고대 가나안 이방종교에서는 그들의 신을 숭배하는 방법이 신전에 가서 사제(남창)와 동성섹스를 하는 것이었다는 점(Boswell)에 기인하여, 동성애에 대한 신구약의 부정적인 태도는 ‘동성애’ 그 자체에 대한 것이라기 보다는 당시 ‘동성섹스’ 행위가 일상적으로 행해졌던 무대인 ‘우상 제사’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로 이해해야 보다 더 문맥에 맞다는 것이다.

 

무슨 소리냐. 옛날 우리 나라에서 자주 사용되던 말 중에 “상투를 틀었다”라는 표현이 있다. 이건 문자 그대로 ‘머리카락을 끌어 올려서 정수리 부분에서 감아 맸다’라는 것을 지칭하겠으나, 상투가 일상적이지 않은 오늘날 이 표현을 사용하는 주된 의미는 잘 아는 대로 ‘남자가 장가를 갔다’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과거 사회문화적으로 남성이 장가 들기 전에는 상투를 틀지 않고 댕기를 따다가 장가 든 이후에 상투를 트는 풍습을 알고 있을 때에 본연의 의미가 제대로 전달될 수 있다. 고로,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원빈이 상투를 틀었다’라고 말하면, ‘원빈이 머리카락을 끌어 올려서 정수리 부분에서 감아 맸다’라는 걸 말하려 한다기 보다는, ‘원빈이 결혼했다’는 사실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암스테르담 게이 퍼레이드

마찬가지로, 성서에 문자적으로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롬 1:27)을 하는 일을 죄로 표현하는 기록에 대해, 그것이 성서 기록 당시의 사회문화적인 상황에서 성서의 1차적 독자에게 어떻게 들렸을지에 대해 깊이 생각하기도 전에, 그저 문자 그대로 ‘동성섹스는 죄’, 더욱 소급하여 ‘동성애는 죄’라고 치환하여 독해하는 것은 ‘비약’이며 신학한 이들의 경우에는 ‘불성실’이며 그리스도인의 경우에는 ‘오만’이라는 것이다. 원빈이 상투 틀었다는 얘기에, 진지하게 ‘뭘로 묶었대?’ 묻는 격이다. 이 문자기록 자체가 정확하게 ‘동성애’를 겨냥한 것인지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여러 사회문화적 정황이라든지 당시의 언어적 사용의 문제라든지 등에 대한 논리적 갭들이 충실하게 메워져야 한다. 성서의 이 표현들은, ‘장가 간다’는 표현을 ‘상투 튼다’라고 표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죄악된 어떤 특정 행위의 한 면을 묘사하는 ‘숙어적 표현’일 수 있으며, 앞서 언급한 성서신학자 보스웰에 따르면, 이러한 숙어적 표현이 지칭하는 죄악은 바로 당시에 매우 성행했던 “우상 숭배”, “이방신 숭배”일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것이다.

특별히 고린도전서와 디모데전서에 등장하는 동성애 관련 표현들은 ‘사회적 지위를 이용한 학대적 섹스’를 언급하는 지시어로서 사용되었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대표적으로 Victor Furnish, Robin Scroggs) 기원 후 1세기 로마제국의 도덕적 퇴폐와 함께 남성시민들은 넘쳐나는 여성 매춘 외의 새로운 경험을 맛보기 위해 젊은 남자 또는 어린 소년을 노예로 사들여 성적으로 학대했다. 헬미니악은 이들의 연구를 다음과 같이 옮겼다. 이것이야말로 [2-B]의 전형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chains-19176_1280남자(시민)들은 자신의 정욕을 채우려고 노예들을 소유했고 그들을 성적으로 학대했다. 매력적인 소년과 소녀들은 납치되어 성적인 노예로 팔렸다.(이것이 디모테오 1서 1장 10절에 나오는 죄악 목록 중 “/arsenokoitai/”(남색하는 자) 다음에 “인신매매를 하는 자”가 나오는 이유일 것이다.) …… 그러므로 기원 후 1세기 도덕주의자들이 동성 간 성행위에 반대하며 단죄한 대상은 착취와 불평등, 성적 학대, 정욕이었다. 그것은 그리스어를 쓰는 유대인들이 마찬가지로 로마 사회에서 단죄하던 대상이었다. 그렇다면 “/arsenokoitai/”가 정말로 남성 간 섹스를 가리킨다고 가정할 때 우리는 그 용어가 모종의 학대적인 섹스를 단죄하는 것이라고 결론지어야 한다. (헬미니악, 163-164)

물론 헬미니악과 넬슨 등은, 성경이 ‘동성애’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을 취한다고 볼 수 있다는 데에 동의한다. 그러나 성경이 동성애에 부정적인 주된 이유는 다분히, 동성애가 당시의 가장 중요한 사회적 가치이자 자산인 ‘”자식”을 생산하지 못하는 행위’라는 점에서 당시 히브리민족적 사회문화의 특성에 따라 기피되었다는 논증이다. 이것은 대를 잇기 위해 형수와 관계하다 땅에 설정하여 저주를 받는 ‘오난’의 사건(창 38:9-10)에서도 확인된다. 생명이 담긴 정액을 낭비하여 부족한 노동력과 인구를 확충하지 ‘않는’ 행위는 그것이 동성섹스이건 질외사정이건 ‘사회적 이유’에 의해 정죄당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사회적 정죄’가 ‘하나님의 정죄’와 꼭 같지는 않다.

정리하자면, 성경에 기록된 ‘동성애’에 대한 혐오스런 태도를 보이는 것 같은 본문들은 모두 ‘우상 숭배’에 대한 혐오, ‘폭력’과 ‘도구화’에 대한 혐오 등으로 치환하여 읽을 수 있는 근거들 – 단지 근거들만이 아니라, 그렇게 치환해서 읽어야 보다 문맥에 상통하는 본문의 뜻이 드러난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적지 않다 – 이 상당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아무런 선이해 없이 그저 한글로 된 신구약을 읽고 ‘성경에 보니 동성애는 죄라고 나와있네’라고 규정하는 것은 너무 섣부르다는 것이다.

2) ‘성’과 관련한 성경 본문의 경우.

조금 더 범위를 넓혀서, 성서는 ‘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살펴보도록 하자.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동정녀’로 표현한 점, 예수님은 결혼하지 않았던 점, 예수님이 언급한 ‘천국을 위하여 고자된 자’, 바울도 ‘독신’의 장점을 주장한 점, 바울이 결혼에 대해 말하면서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음행을 피하기 위하여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고전7:1-2)라고 한 점,… 등등을 고려할 때, 기독교 초기 교부들이 본 대로 성경은 ‘성’을 기피 내지는 부정적인 눈으로 본다! 고대 기독교의 기틀을 마련한 성 아우구스티누스도 원죄가 유전되는 방식을 설명하면서, 원죄가 유전되는 통로가 바로 ‘섹스’를 통해서였다고 보았다. 자식을 낳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이 행위를 통해 ‘원죄’도 함께 유전된다고 본 것이었다. 그러니 ‘섹스’를 통해 태어난 신생아도, 그들이 무언가 ‘자범죄’를 짓지 않은 상태라 하더라도 ‘섹스’라는 부정적인 행위를 통해 존재하게 된 만큼 그 존재 자체는 ‘죄’에서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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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우리가 정말로 순수하게 성경을 읽고 순수하게 성경을 믿는다는 생각으로 ‘성경은 동성애를 죄라고 말씀한다’라고 하려면, 동일한 의미에서, ‘성경은 ‘성’에 대해서도 부정적으로 본다’라고 말해야 한다. 동일한 관점에서 ‘이성애’ 역시 부정적으로 보아져야 하며, 섹스는 단지 “자식을 생산하기 위한 방법”으로서만 행해져야 하며, 그러한 필요 이외의 섹스는 엄히 지양되어야 한다! 질외사정하면 하나님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물론 이러한 주장이 타당하려면, ‘가정’이라는 제도와 ‘성’이라는 범주를 사용하여 창조 세계의 역사를 지속시키시는 하나님을 걸고 넘어져야 한다. 과연 성경이 일부분에서 ‘성’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해서 ‘성’ 자체가 존재론적으로 부정적인 것인가?

이러한 모순에 대해, 헬미니악은 이렇게 말한다. “실수는 성서를 읽는 방식에 있는 것이 틀림없다!”(헬미니악, 10)

3) 성서 안의 반례!

동성애 논쟁에서 좀처럼 주목받지 못하는 성서 본문이 있는데, 바로 마태 8:5-13과 누가 7:1-10에 평행으로 등장하는 ‘백부장의 종 치유’ 본문이다. (최근 홍신**에 의해 논의된 내용인데, 사실 이는 홍신**의 독창적 해석이라기 보다는 이미 이런 식의 주석이 있어왔던 것을 그가 옮겼을 뿐이다. 그러니 자꾸 성서를 ‘자의적’으로 해석하니 마니 하는 이야기는 그만 했으면 좋겠다.) 암튼 헬미니악은 두 평행본문을 종합적으로 분석하여, 예수님이나 성서 기자가 그를 부를 때(종, /doulos/)와 백부장이 그를 부를 때(하인, /pais/) 사용하는 용어의 의미 차이와, 또한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들어, 그 종은 부유한 백부장의 성적 노예이자 연인이었을 것으로 본다. 당시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그들을 틀림 없이 ‘동성 연인 관계’로 보았을 거라는 말이다. (헬미니악, 191-195) 물론 이는 언제까지나 ‘개연성 있는 가능성’일 뿐이지, /pais/는 무조건 ‘동성 연인’으로 해석해야 한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본다면 이 사건은, 동성애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도 하지 않으셨던 예수님께서 남성 간 동성애 관계를 눈 앞에서 마주치셨던 성경 기록 속의 유일한 사건이 된다. 그러나 예수님은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젊은이를 건강하게 만들어서 백부장에게 돌려 주시기까지 했다! 이에 대해 헬미니악은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Daniel A. Helminiak

Daniel A. Helminiak

“우리는 이 책 전반에 걸쳐 살펴본 똑같은 교훈이 여기서도 뚜렷하게 나온다는 걸 발견할 수 있다. 우리가 성서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안다고 주장할 때에는 사물을 그것들이 존재했던 역사적 맥락 가운데서 이해해야 한다는 교훈이다. 우리의 견해를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이 사시던 세계에 투사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사실, 동성 간 성행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시던 세계에서는 흔히 일어나는 일이었다. 틀림없이 그분은 그것을 알고 계셨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동성애 관계를 단 한 번이라도 문제 삼으셨던 그 어떤 기록을 가지고 있지 않다. 심지어 그분께서 그것을 눈 앞에서 마주치셨을 때조차 말이다.” (헬미니악, 195).

물론, 그렇다고 예수님이 동성애를 ‘인정’하셨다고도 말할 수는 없다. 헬미니악은 이렇게도 덧붙였다. “그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동성애가 괜찮다고 생각하신 걸까? 물론 우리는 그분의 생각을 알지 못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과 하신 일밖에는 알지 못한다.”(헬미니악, 194).

4) “성서는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다”는 말의 의미.

보다 충실한 대답을 얻기 위해 우리는 성경의 존재론적 위치를 보다 적실하게 인식해야 한다. 적어도 유기적 영감설이나 칼 바르트실재적 영감설(reale Inspiration)에 의하면, 성경은 그것을 기록한 저자를 완벽하게 배제하고 오직 순수한 하나님의 음성만을 담아놓은 책은 아니다. (이것이 필자가 위에서 ‘하나님’과 ‘성경’을 굳이 구분했던 이유이다!) 인식론적으로 한계지워진 인간에 대한 관념론적인 썰을 굳이 풀지 않더라도, 성서는 어쨌든 ‘인간의 언어’로 기록되어 있다. 우리가 보는 성경은 ‘한글’로 기록되어 있고, 그 말은 ‘한글’이 충분히 우수한 언어임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로 가지는 언어적 한계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히브리어와 헬라어 역시도, 그리고 중세시대를 지탱해왔던 라틴어 역시도, 그 언어 자체가 가지는 한계성만큼만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다. 또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책에는 첫 페이지와 끝 페이지가 있는 것 만큼의 한계까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한다. 즉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한에는 성경보다 더 우월한 하나님 말씀의 존재론적 현현이 이 세상에 없다고 믿지만, 그리하여 성령에 의해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권위를 득한다고 믿지만, 무한한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는 언어화되고 문자화된 성경 그 이상의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요 21:25)

Karl Barth

Karl Barth

이 부분을 이해한다면,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문자들이 최소한 하나님에 의해 암묵적으로라도 ‘인준’은 되었을지언정, 그 안에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말씀’과 동시에 인간 저자의 목소리나 문화구조적 상식 및 선입관 등이 동시에 얽혀 있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성경은 인간 저자가 동시대인들에게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을 알리기 위해 기록된 것이라는 목적을 일차적으로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 인간 저자의 목소리가 개입되어 성경이 뭔가 틀린(잘못된) 것처럼 여겨질 때, 유기적 영감설에서는 이를 ‘난제’ 혹은 ‘성서원본무오설’로 풀어내고, 칼 바르트는 ‘인간에 의해 성경에 포함된 오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서도) 말씀하신다!’라고 단언한다.)

이렇게 볼 때에야 비로소 공관복음서들 사이의 증언의 불일치 문제나, 역대기와 열왕기서의 역사 기록의 불일치 문제, 또한 이스라엘의 사사로서 자신의 딸을 하나님께 인신제사(! 인신제사는 당시의 대표적인 ‘우상 숭배의 방식’이었다!!)를 올린 입다의 문제 등을 대할 때조차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권위를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성서를 읽어낼 수 있다. 즉, 성경에는 인간의 목소리가 섞여 있기에, 성경 텍스트 안에 문자적으로 들어가 있다고 해서 곧 그것이 무조건적으로 하나님의 목소리가 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성’에 대한 성경의 부정적인 태도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기 보다는 성경의 인간 저자들의 사회문화적 태도가 성경 안에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히브리인들의 사회문화적인 상식 전제들이 ‘영감’이라는 과정을 통해 성경 안에 포함된 것이라 보아야 한다. 그렇게 본다면 ‘성’에 대한 성경 일부의 부정적인 태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태초부터 오늘날까지 ‘성’이라는 매개체를 통하여 인류를 존속시키신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를 찬양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성경에는 ‘성’ 혹은 ‘섹스’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만이 일관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백 번 양보해서 성경의 일부 구절이 ‘동성애’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취한다고 보더라도, ‘동성애에 대한 혐오’ — 그것이 ‘동성애자’에 대한 혐오가 아닌 경우에도 — 를 두고 그것이 곧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며 따라서 그것이 하나님을 신앙하는 길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단정지을 수 없을 뿐 아니라, 특별히 ‘동성애자’에 대한 혐오는 반(反)그리스도적이기까지 하다. 이는 다름 아닌 성경에 의해 지지된다.

5) 전체 내러티브로서의 성경과 동성애.

앞서 물었듯이, 우리는 ‘동성애’ 문제에 대한 성서의 태도를 파악하기 위해 ‘동성애’ 관련 표현이 등장하는 구절만 검토해야 하는가? 이미 살펴본 대로, 해당 구절만 가지고는 이렇다 저렇다 결론을 내기가 어렵다. 한편으로는 문자 그대로를 받아들여 ‘남성간의 섹스는 죄’라고 받아들일 수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해당 문자의 당시 용례를 연구하여 ‘해당 본문이 동성애에 대한 정죄로 볼 수 없다’라고 받아들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제는 성서 전체 내러티브의 견지에서 이 문제를 바라보아야 하겠다.

cross-364676_1280성경의 전체 내러티브를 단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사랑’이다. 이 전체 내러티브는 예수 그리스도에 집약되어 나타나며,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서 절정에 이른다. 실로 성경에는 6번 정도만 등장하는 (충분히 다른 해석의 여지가 있는) ‘동성애’라는 글자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랑’의 사건들이 등장한다. 아니, 실로 성서 전체가 ‘사랑’을 구실로 존재하며, ‘사랑’만을 이야기한다. 구약의 성결법전이 요구하는 ‘거룩’은 하나님과 인간간의 연합적 ‘사랑’의 언어로서 요구되며, 이러한 연합적 사랑의 언어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 등의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연합적 ‘사랑’으로 연결될 뿐 아니라, 신약에 와서는 그 율법들이 타인에 대한 사랑으로 ‘환원’되기까지 한다(롬 13:8-10). 간음한 행위로 인해 성전 앞으로 끌려 나온 여인은 예수로 인해 위기를 모면하고 새로운 기회를 얻는다(요 8:2-11). 사람을 영접함은 곧 초월자를 영접함이다(마18:5). 반면 예수를 믿는 작은 자 중의 한 사람이라도 실족하게 만든다면 반드시 심판이 있을 것이다(마18:6).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요 13:34-35)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라 자칭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사람이 ‘동성애자’라 하여 그의 성관계 장면을 상상하며 이를 혐오하고 저주하는 것은 마치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눅18:11) 하는 바리새인의 오만한 기도, 그리하여 곧 예수님에게 까이게 되는 것과 같다.

동성애와 성서의 문제에 대한 실한 입문서를 저술한 헬미니악은 “성서가 성윤리에 관한 최종 결론을 제시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헬미니악, xxvii)고 보았다. 그의 이야기를 좀 더 들어보자.

Daniel A. Helminiak

Daniel A. Helminiak

최근의 성서 연구를 살펴보면 성서적 관심의 초점인 ‘동성 간 성행위’는 최소한 오늘날 우리가 의미하는 ‘동성애’가 아니었음이 드러난다. 성서는 그 문제를 매우 다른 상황하에서 매우 다른 방식으로 이해했다. 더군다나, 이들 연구는 성서가 기본적으로 동성애 그 자체는 문제삼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이성애와 마찬가지로 성서는 동성애적 행동이 그 밖의 다른 도덕적 요구사항에 어긋났을 때에만 관여했던 것이다.(헬미니악, xxvii)

성서가 동성애를 단죄할 어떤 진정한 근거도 제시하지 않는다는 것은 내가 보기에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기에 단순히 성서를 인용함으로써 동성애에 반대하는 일을 그만둬야 한다. 성서는 동성애를 반대하는 입장을 전혀 지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다른 이유로 동성애에 반대하는 것이라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 분명히 밝혀야 할 것임은 물론이다.(헬미니악, xxi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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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넬슨은 한 발 더 나아가서, 성서 안의 동성애 언급 본문들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이 충분히 존재하는데도 불구하고 성서의 해석권을 가져왔던 교회는 지금까지 이를 ‘동성애 혐오감’에 기반하여 편향되게 자의적으로 해석해왔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자의적 해석 뒤에 숨겨진 동인적 이데올로기의 정체는 바로 부지불식간에 이들 안에 자리잡은 ‘이성애중심주의’라고 보았다. 이것은 사회문화의 헤게모니를 잡은 다수의 ‘이성애자’들이 볼 때 동성애자는 무언가 ‘다른'(different) 존재들인데, 이 ‘다름’을 인정하다 보면 ‘이성애 = 정상’이라는 공식이 깨지게 된다는 것. 이 공식은 매우 강력한데, 그 이유는 이성애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일말의 수치스러운 성적 욕구 – 혹은 여성을 도구화하는 권력욕 – 마저도 ‘정상’의 영역으로 정당화해주며, 따라서 자신들의 성적 정체성에 안정감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공식이 위태로워진다면, 자신들의 안정적인 성적 정체성 즉 자신들의 성적 욕구를 정상으로 합리화해주는 그 안정성이 위협되는 것이며, 따라서 이것을 ‘자신들’에 대한 공격으로 인식해버린다. 여기에 이성애자들의 ‘두려움’이 존재한다. 자신들이 ‘정상’의 위치에서부터 배제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 아무리 못된 짓을 해도 이건 ‘이성을 향한 자연스러운 욕망의 발로일 뿐’이라며 정당화하면서 최소한 ‘저 변태들’보단 정상이라 생각했는데 어쩌면 ‘저 변태들’과 같은 취급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 이 공포감은 곧 동성애(자)에 대한 공포감으로 변형되어 분출되며, 또한 자신들의 안정성에 위협을 가한 동성애(자)에 대한 혐오감으로 분출된다. 즉 ‘호모포비아(homophobia)‘이다.

성경을 논하건대 빼먹을 수 없는 구절이 바로 예수님이 직접 인준하신 ‘가장 큰 계명’ 구절일 것이다. 예수님에 의해 인준된 가장 큰 계명은 두 가지이다. 1) 하나님 사랑, 2)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 그리고 이것을 가장 잘 실천하는 예로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을 말씀하신다. 사마리아인? 예수님에게 영생에 대한 질문을 물었던 유대 율법학자의 관점에서, 사마리아인은 지독하게 나빠서 상종조차 하지 말아야 할 존재들인데, 이는 북이스라엘 왕국 성립 이후 왕국의 정통성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여러 종교적 왜곡을 단행한 이들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즉 유대 율법학자에게 있어서 사마리아인은 소위 이단.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러한 유대-사마리아 간의 배제적 경계선을 보란 듯이 훌쩍 뛰어넘으셔서는, ‘가장 큰 계명’을 가장 잘 지키는 표본으로 ‘사마리아인’을 등장시키신다. 그것도 유대 제사장과 레위인의 한계를 까발리신 상태에서!

bc하나님의 사랑은 ‘경계 넘음’에 있다. 영이신 하나님과 육체인 인간의 경계를 넘어서 예수님이 성육하여 오셨다. 삶에서 죽음으로 몰아내쳐지셨지만, 보란듯이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으신 사건이 바로 부활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스라엘의 선민적 경계도 넘어서고, 계급간의 경계도 넘어서고, 율법-비율법의 경계도 넘어서고, 남녀간의 경계도 넘어서고, 유대-사마리아간의 종교적 경계까지 넘어서신다. 당시 사회문화적 인식에 따라 ‘죄인’으로 취급받던 창녀와 세리와 각종 여러 죄인들과 율법적으로 철저한 진보주의 인사들이었던 바리새인들 사이의 공고한 경계도 허무신다. 2000년의 시간적 경계도 넘어서, 바로 오늘 2015년을 사는 우리에게까지 오셔서 말씀하신다. 본질적으로, 절대선으로서의 하나님과 죄된 우리 사이의 경계까지 넘어서 우리를 만나신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하심의 능력이 고작 ‘동성애’라는 경계(아무리 동성애를 ‘죄’로 여긴다 하더라도 말이다!)를 못 넘으실 거란 상상은 천박하기 짝이 없다. 그런 하나님 앞에 ‘이성애’와 ‘동성애’의 경계선을 확증해달라는 우리의 모습은 정말로 저열하기 짝이 없다.

적어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보다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타자들에 대한 배제의 논리를 걷어내고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된 이들로서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적어도 성소수자들을 배제의 논리로 거부하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롬 12:2) 성서의 이름으로 동성애를 정죄하려면 정죄하라. 그와 함께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전14:34)고도 말하라. 질외사정하면 하나님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된다(창38:9-10)고도 말하라.

 

(3편에 계속…)

*본 글의 이미지와 참고링크는 편집부에서 추가한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관련글>

‘동성애는 죄인가?’라는 질문을 씹고 뜯고 물고 핥기 (1)

‘동성애는 죄인가?’라는 질문을 씹고 뜯고 물고 핥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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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인 척 하고 싶지 않은 b급 날라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