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애는 죄인가?’라는 질문을 씹고 뜯고 물고 핥기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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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3

4. “동성애는 죄인가?”를 궁금해하는 기저에 대하여

이 쯤에서 결론으로 마무리해도 되겠지만, 굳이 이 부분을 집어넣는다. “동성애는 죄인가, 아닌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이들에게 거꾸로 묻는다: “그것을 궁금해하는 기저에는 무엇이 있는가?” 아마도 동성애에 대한 하나님의 판결 여부에 관심이 생기게 된 계기는 다양하겠지만 말이다. 호기심 자체가 죄는 아니다. 그러나 이 부분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무성하게 배태되는 구조적 악을 끊어낼 수 없다. 우리가 동성애의 유죄/무죄 여부가 궁금하여 그 끝장을 보려는 순간, “그래서 죄라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라고 묻는 순간 벌어지는 일은 다음과 같다.

1) 자기우상화

동성애 문제와 관련하여 동성애를 단순한 유죄/무죄의 틀에 가두어 놓으려는 것은 다분히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는 욕망과 맞닿아 있다. 동성애가 죄인지 아닌지를 알면, 동성애자가 죄인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고, 그들을 정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알 수 있고, 그들을 성도로 받아들일 수 있을지 없을지 알 수 있고, 친구가 될 수 있을지 없을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동성애자들의 동성지향을 하나님이 만드셨는지 아닌지, 그것이 실수인지 아닌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복잡다단한 것은 귀찮다. 이성애자면 ‘착한 사람’, 동성애자면 ‘나쁜 놈’이면 편할텐데, 뭐 이렇게 복잡해. 그냥 어쨌든 동성애자는 나쁜 놈이야!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 하나님의 복잡다단함을 자신의 간단명료함으로 대체시킨다. 하나님의 기준을 내 기준으로 대체시킨다. 이른바 하나님보다 우월한 판단 주체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mallet-117187_640전술하였듯이, 우리는 아직까지 동성 지향이 선천적인 것인지 아닌지, 그리고 동성애와 이성애 사이의 확연한 경계선의 존재의 문제에 대해 ‘확정적으로’ 말할 수 없다. 동성애가 후천적이라 하여도 그것이 곧 ‘죄’로 연결되는 문제인지에 대해서도 ‘확정적으로’ 말할 수 없다. 즉 인간의 ‘앎’이라는 유한한 ‘체계’ 속에 미지의 영역을 꾸역꾸역 집어넣을 수는 없다. 성서에 나온 ‘동성애’ 관련 본문도 ‘모든 종류의 동성애 행위’에 대해 포괄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도 ‘확정적으로’ 말할 수 없다. 신비에 대해 확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는 모른다’ 뿐이다. 조금 더 나아가 ‘무엇을 알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이 항상 ‘잠정적’이라는 진실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가 잘 모르는 것들에 대해 내 경험과 지식에 의해 확정적으로 말해버리는 것은 곧 하나님을 내 머리로 예측하고 계산할 수 있다는 뜻이며, 하나님이 내 손바닥 안에 있다는 뜻이다. 게다가 내 앎의 수준을 ‘확정적으로’ 말한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보다 더 우선적이고 우월하다는 뜻이다.

‘나는 동성애에 대한 모든 면모를 알고 있다’는 것은 ‘나는 판단자가 될 수 있다’로, 또다시 ‘나는 하나님이 될 수 있다’는 함의로 발전된다. 특히 그것이 몇몇 회심자(?)의 사례에만 근거한 것일 때, 그로부터 구성된 ‘하나님’은 과연 얼만큼이나 ‘하나님’일는지 알 수 없다. 전술한 대로, 우리에게는 동성애에 대한 하나님의 입장을 정확하게 파악할 증거도 없고 능력도 안 되는 유한한 존재라는 점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성애를 죄로 규정하려는 행위는, 우리 안에 우리도 모르게 자리잡은 ‘이성애중심주의’와 그것이 야기하는 바 ‘동성애혐오감’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놓고, 하나님과 성경을 도구삼아 그 이데올로기들이 ‘악’이라고 규정하는 바를 ‘죄’로 인준해주는 것 밖엔 되지 않는다. 자신이 ‘정상’이 아닐 수 있음에 대한 공포심이 우리를 스스로 하나님의 자리로 올려놓고 우리 ‘이성애자’를 스스로 구원한다. ‘하나님을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결국 자신의 ‘공포심’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놓을 뿐이다. 그리고 그 ‘공포심’이 시키는 바 ‘혐오’를 폭력적으로 분출해내는 것을 거룩한 하나님 나라의 운동인 양 착각해버린다. 이는 다른 것 아닌, ‘자기우상화’이다.

2) 순수한 호기심이 가져오는 잔혹한 배타성

아. 뭐 꼭 굳이 이러한 무시무시한 하나님의 영역에의 침범의 의도를 가지고 궁금해했던 것은 아니라는 혹자의 억울한 소리가 들리는 듯 하여, 굳이 한 번 더 지적해보려고 한다. 그래, 필자도 당신이 ‘순수한 호기심’으로 인해 이 질문에 접근했던 것을 정말로 믿는다. 필자도 그랬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쩌면 이것이 정말로 무서운 것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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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상 ‘순수한 호기심’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호기심을 가진 입장에서야 당연한 인식론적 사각지대로 말미암아 정직하게 ‘순수’할 수는 있겠으나, 그 ‘순수한 호기심’에 대한 탐구는 항상 정치적이고 권력적인 결과물을 배태해내기 때문이다! 이해하기 쉽게 예를 들어 보자면, 가만 보니 필자가 만난 대부분의 여자는 남자인 필자보다 키도 작고 힘도 약했으며 필자보다 훨씬 더 감정에 잘 휘둘리기도 하고 갖은 오해를 양산해냈던 것 같다. 이런 필자의 ‘경험’에 근거한 이유로, 정말로 ‘순수한 호기심’으로, “여자는 남자보다 열등한가?”라는 질문을 던진다면? 그리고 그 질문을 매우 공개적으로, 그리고 신의 이름을 빌어 이러한 질문을 정당화한다면? “에이, 그냥 순수한 호기심으로 물어보는거야”라는 건 그 질문이나 탐구 과정이나 대답이 폭력적일 수도 있겠으나 내가 거기엔 책임을 지고 싶진 않다.는 뜻이다. 이 질문과 비슷한 종류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흑인은 사람인가?”, “인디언들에겐 영혼이 있는가?”, “아시아인은 백인보다 열등한가?”, “아시아인에겐 뇌가 있는가?”

사실 이러한 질문들은 인간 역사상에 실존했던 것이었으며, 따라서 이는 인간 본연의 죄성과 무지함의 증거라 할 만한 것들이다. 궁금해하는 입장에서는 지 나름대로의 ‘순수성’을 주장할 수 있다 쳐도, 그것이 호기심의 ‘대상’이 된 이들에게는 첫째로는 개별주체자의 갖은 노력을 ‘여자’ 혹은 ‘아시아인’이라는 기준으로 전체화시켜버리는 전체주의적 폭력이요, 둘째로는 이 질문은 최악의 가능성(‘열등하다’, ‘사람이 아니다’, ‘뇌가 없다’ 등등..)을 어느 정도 인정하고 들어가는 것이라는 점에서 인식론적 폭력이다. 마찬가지로, ‘동성애가 죄인가?’라는 질문은 그 원래 목표인 ‘순수한 호기심의 충족’에서 결코 그쳐지지 않으며, 그 대상이 되는 이들을 폭력적으로 전체화하고 대상화한다. 그리고 그 나름의 프로세스를 통해 도출된 결론의 방향 여부에 따라 순수하게 호기심을 가졌던 사람은 새로운 여자, 흑인, 아시아인 등을 만날 때에 자신의 결론의 방식대로 보고 처신하고 행동하게 된다. ‘아, 아시아인들에겐 뇌가 없지?’라며. 물론 도출된 결론이 얼마나 타당한 것이었는가에 대한 검증 절차는 거의 일어나지 않으며, 상당히 많은 경우에는 ‘그냥 그런 기분이 들어’ 따위가 도출된 결론의 주요 근거로서 사용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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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는 죄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각자 나름의 결론이 얼만큼 타당한 프로세스에 의해 도출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그것에 대한 나름의 결론은 그저 그 ‘답 얻음'(‘동성애는 죄다’ 혹은 ‘동성애는 죄가 아니다’)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그저 잔잔한 호숫가에 심심풀이 삼아 물제비를 뜨는 것일는지는 몰라도,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하나님에게까지 용인되지 못함에 대한 선고”로, 그리하여 스스로도 스스로를 포기함으로까지 연결되는 악마적 구조로 다가오는 일임은 분명하다.

3) 제안

차라리 불가지론을 외치고, ‘인간’이 되자. 자꾸 하나님인 척 하지 말고, 인간이 되자. 인간의 ‘인식’은 존재론적으로 한계지워져 있을 뿐만 아니라, 당위적으로도 스스로 한계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요한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에 대해 궁금해하던 베드로의 질문에 예수님이 답하셨던 내용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말씀해주신다.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요21: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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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해낼 수 없는 것에 하나님보다 앞서 답해내려고 하지 말고, 답해내다가 스스로 하나님 되지 말고, 그저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예수를 따름’에 충실하자. 우리가 ‘분별해내야 할’ 것은 동성애의 유죄/무죄 여부가 아니라, 아주 나이브하고 순수하게 동성애의 유죄/무죄 여부를 물으면서 일어나게 되는 우리의 ‘기고만장함’이다. 자꾸 헷갈려 해서는 안 된다. 예수를 따름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자신들 속의 죄를 규정해내서 그 죄를 제거하여 하나님과 같이 거룩해지는 것……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이 작업에 도가 튼 부류가 바로 바리새인들이다. 혹시라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안식일을 범할까 두려워 정밀한 행동 규칙들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수호함으로써 스스로의 거룩성을 지키려고 했다. 자신들의 열심과 거룩이 하나님 나라를 앞당길 것으로 생각한, 진보 중의 진보였다. 그러나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다시피, 이들의 행위는 예수에 의해 가루가 되도록 까였다. 그들이 율법을 ‘완벽하게’ 준수하지 못했기 때문에 까였나? No! 그들은 ‘거룩’해지느라 너무 바쁜 나머지, 자신들이 ‘인간’인 것을 까먹었다. 주변의 ‘인간’들을 까먹었다. 예수를 따름이란, 다름 아닌, ‘사랑’이다. 하나님을 반쪽짜리로, 단지 일부분의 하나님으로 제한해서는 안 된다. 굳이 율법적인 스탠스를 취하자면, 그것은 ‘성령을 훼방하는 죄’이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4-35)

5. 나름의 잠정적 결론

동성애는 죄인가? 이 문제를 물으려면 적어도,

  • [1-A] 당사자간의 사랑에 의한 이성애
  • [1-B] 자신의 욕구 충족을 위해 상대방을 도구화하는 이성애
  • [2-A] 당사자간의 사랑에 의한 동성애
  • [2-B] 자신의 욕구 충족을 위해 상대방을 도구화하는 동성애

이러한 갈래들로 접근되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앞서 밝혔듯이, 이러한 구분은 개별자 단위로 무 자르듯 나뉘어지지 않는다. 이성애자인 필자는 사랑해 마지 않는 아내와의 관계에 있어서 언제나 모든 순간에 (단지 성적 관계 뿐만 아니라 모든 관계의 양상에서) [1-A]이기를 희망하지만, 그렇게 되지만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오히려 순간 순간마다 [1-A]와 [1-B] 사이를 부지런히 유동적으로 오가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누구의 이성애는 [1-A]요, 또 다른 누구의 이성애는 [1-B] 라 고정적으로 단정지을 수 없다. 환원주의는 지양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각각의 순간과 사건에 따라 “어느 편이 주도적인가”를 물은 이후에야 논의를 위한 편리를 득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갈래를 전제하여 동성애에 대해 논하자면, [2-B], 즉 ‘자신의 욕구 충족을 위해 상대방을 도구화하는 동성애’는 죄라는 입장을 필자는 잠정적으로 견지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것이 죄라 여기는 이유는 ‘동성 간에 섹스 행위가 이루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상대방을 도구화하는 폭력 행위가 자행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정죄는 [1-B], 즉 ‘자신의 욕구 충족을 위해 상대방을 도구화하는 이성애’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여기에서 욕구가 성적 욕구이든, 정복 욕구이든, 상대방에게 외적 이득을 얻어내려는 탐욕이든, 상대방과의 섹스를 통해 우상을 숭배하려는 것이든, 상대방을 도구화하는 것은 죄다. 라고 필자는 본다. 그러나 상대방이 ‘이성’이든 ‘동성’이든 그것이 상대방을 도구화시키기를 그치게 하는 ‘사랑’에 기초한 관계라 한다면, 그것을 죄라 단정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이 문제는 동성애적 성향이 하나님의 창조 의도와 얼만큼 잇닿아 있는가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할 것이고, 후천적인 경우라 하더라도 성서를 근거로 이를 정죄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명확하지 않다. 모든 것은 “그 때”(고전13:12)에 가서야 명확해질 것이다. 그 이전에는 “거울을 보는 것 같이 희미”하게 볼 수 있을 뿐이며, 따라서 ‘불가지론’을 외칠 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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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우리가 ‘동성애/이성애’에 대한 이원론적인 접근에서 양단간의 어떤 특정한 판단을 내린다는 것 자체는 스스로 하나님이 될 위험과 그것이 야기하는 폭력과 배제의 문제를 볼 때, ‘판단하지 않음’의 결단이 더욱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이성애자’로서 만나거나 ‘동성애자’로서 만나기 보다는, 그러한 작위적 분류를 넘어서는 ‘판단유보’를 통해 ‘그리스도성애자’로서 다 함께 한 상에 둘러 앉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리스도성애자들’을 ‘이성애자’와 ‘동성애자’로 분리해서 한 상에 둘러앉지 못하게 하는 모든 악에 대항하여 싸우는 것이 오히려 진지한 그리스도인들이 참여해야 할 하나님 나라의 운동 아닐까.

혹자는 필자의 입장을 ‘동성애 옹호’의 글이라고 볼지 모르겠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나, 그렇게 말하기엔 너무 편향적이다. 개인적으로 필자는 이성애자로서, 동성애와 이성애 양쪽 모두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하여, 필자가 이 글을 통해 하고자 했던 기획의 방점은 단지 ‘동성애 옹호’가 아니라 ‘성애 옹호’에 있다. 조금 더 나아간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각각 ‘동성애 옹호자’ 혹은 ‘이성애 옹호자’로서가 아니라, 그 경계를 허무시는 ‘그리스도성애 옹호자’로서 존재할 수 있기를 바람이다.

그러한 점에서 필자는 차별금지법이 기독교(특히 개신교)의 반대에 의해 저지되었다는 사실이 가리키는 지점에 우리의 처참한 현 주소가 있다고 보며, 동성 결혼 합법화의 문제나 최근 서울시인권조례의 문제와 관련한 기독교계의 움직임에도 동일한 반성의 지점이 있다고 본다. 물론 반성해서 변화될 일인지는 잘 모르겠다. 너무나도 ‘선한’ 모멘텀으로 귀를 닫는 일과 폭력적인 일에 열정적이셔서들..

 

 

(4편에 계속…)

*본 글의 이미지와 참고링크는 편집부에서 추가한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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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인 척 하고 싶지 않은 b급 날라리 목사.